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문단 편집) === [[고제(전한)|한고조]]와의 비교 === * 출처: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9481|유방의 북벌과 제갈량의 북벌이 다른 점]] 기본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한 고조의 선례를 따른것으로 초한 쟁패 시절 [[한신]]을 얻고 북벌을 한 한 고조의 행적과, 삼국 시대 위나라에 대한 제갈량의 북벌은 언뜻 비슷해보여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나 실제론 이 두 북벌은 기본적인 상황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다. * '진짜 험준하고 깊숙한 파촉' 은 가 본 적도 없는 한 고조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함양을 정복한 항우는 곧바로 공과에 따라 자신을 따른 세력들을 중원 각지의 제후로 임명하는 18 제후왕 분봉을 시행하는데 한 고조는 파촉 지방을 다스리는 한왕으로 임명된다. 이에 한 고조는 낙담했고, 수하 장병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엄청난 오지로 들어가는 듯 하지만. 파-촉의 군주가 되고 유방이 정한 도읍지는 남정(南鄭)인데 바로 [[한중]] 지역이다. 남정의 위치를 지도에서 살펴보면 알겠지만, 훗날의 [[성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한 고조는 자기 생전에 훗날 익주 중심부가 되는 [[쓰촨 성]] 지역은 아예 가 본 적도 없다. 어디까지나 [[익주]] 외곽이 되는 한중, [[섬서 성]] 지역에 머물렀을 뿐인 것이다. [[파일:Wa3pvjV.jpg]] 이 '남정'은 한중에 위치해 있어서 훗날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북벌을 시작하는 최전방 군사 기지' 역할을 한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군수 물자와 병력을 잔뜩 끌고 남정까지 온 다음 거기서 짐을 풀고 기지를 만들고 장수들과 향후 움직임을 논의하는 상황으로, 삼국시대 때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후방인 수도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 지역이었는데, 수백 년 전의 한 고조에게 그 변경은 '왕이 사는 수도'였다. 때문에 당장의 군사 작전은 똑같이 남정에서 시작한다 한들, 여러모로 그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기준에서 보면 '파촉으로 통하는 입구'에 지나지 않는 한중의 남정이, 초한 쟁패 시기에서는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유방은 엄청 화가 난 나머지 전력에서 상대조차 되지 않음에도 이판사판으로 싸워보려고까지 하다가 소하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남정으로 보내는 쪽이나, 남정으로 가는 쪽이나 남정을 '사람으로서 갈 수 없는 곳'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 다만 남정까지만 해도 어쨌건 중화인들이 사는 영토였고, 익주는 당시에는 중화인이 아닌 이민족들이 사는 땅이었다. 남정이라는 이름의 유래 자체도 서주 시절 옹주 지방에 분봉받았던 정나라가 서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같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 유민들이 정착했던 곳이기에 붙은 것이다.]. 만약 이런 초한 쟁패 시대에 유방보고 "너 성도 지역으로 가라"라고 했으면, 유방은 정말로 바로 전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당대의 익주 지역이 외진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 물론 촉 지방에 아예 문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화양국지]]나 기타 기록에도 보이듯이 촉 지방에는 아주 오래된 문명 국가가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면, 삼성퇴 문명을 비롯해 독자적 청동기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고, 목야 대전 때 숟가락을 얹었다든가, 상나라 시절 [[갑골문]]에도 '촉을 쳐야 하는가'라는 점을 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도 이 촉 지방의 나라가 초나라를 친적도 있고, 진나라와 싸우기도 했던 역사가 있었다. 다만 한참 기세를 올리던 진나라에서 '서쪽과 중원, 어느 쪽을 먼저 쳐야 할까'하는 논의를 하던 중, 진나라의 재상 [[장의]]가 '이런 곳과 전쟁을 하는 건 중원에서의 왕업에서 멀어지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이에 반대하여 '촉을 쳐서 그 이익을 취한 다음 중원을 공격하는 게 좋다'라고 주장한 [[사마착]]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니 그래도 오지 중 오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후일 이 지역에 도강언이 세워지고 진나라의 배후지로서 기능했을 때조차도 이곳은 오지로 여겨졌는데 당장 [[여불위]]의 자손들이 이주 당한 곳도 후일 익주의 남중 지역으로, 삼국 시대 때 촉한의 관헌 [[여개]]가 여불위의 자손이다. * 파촉의 풍부한 물산을 이용하여... 운운은 제갈량 시절 이야기. 실제 유방이 파촉 깊숙한 곳은 고사하고 남정에 머무른 시기만 해도 길게 잡아봐야 3~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18 제후왕 분봉을 해서 각지의 왕들을 봉한 시기는 BC 206년 2월. 유방이 파촉에 입성한 것은 4월. 그리고 진창 고도를 통해 군사를 이끌고 옹왕 장한을 쳤던 것은 BC 206년 8월,[* 한서 고제기에 따르면 5월로, 파촉으로 들어간지 겨우 한 달 후이다.] 유방이 분봉 조치를 받아, 과거의 그 험한 길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남정까지 터벅터벅 가서 도착하고,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마련하는 데 한달 정도를 잡고, 전투 준비를 전투 시작 한 달 전 무렵에는 대략 끝내놓았다고 보면, 여유있는 준비 기간은 BC 206년 3~7월 정도, 즉 겨우 4개월 정도인데, 이것도 도착하고 한숨 놓은 뒤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고 타이트하게 잡았을 때이다. 실제로는 매일매일 수많은 제장들이 도망가고 군대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었으니, 실제로 뭔가 준비가 된건 [[한신]]이 대장군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한신을 등용하고 바로 곧장 치고 나선거나 다름이 없는 것. 한신은 "천하가 평화로워진 다음에 싸움을 건다면 백성들은 항우가 아니라 우리를 원망할 것이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 쪽 사람들의 예봉 또한 꺾이게 된다."며 즉시 동진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유방이 받아들인다. 물론 현지의 기반을 이용하기 위해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닌데 자치통감 한기를 보면 >'이에 한왕은 크게 기뻐하고 스스로 한신을 얻은 것이 늦었다고 여기고, 드디어 한신의 계책을 듣고서 제장들이 공격할 부서를 정하였는데, 소하를 남겨두어 파와 촉의 조세를 거두어 군사에 양식을 공급하게 했다.' 라는 언급이 있어, 소하가 해당 작업에 착수하긴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방이 자신에게 협조한 판순만 일곱 씨족에 대해 일체의 세금을 면제시켰고, 나머지도 겨우 1인당 40전을 냈다는 언급을 보면 그리 빡빡하게 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들에게 불만을 사서 뒤가 불안해지는 상황도 위험했을테고. 촉 지방에 항구적인 거점-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반세기 가깝게 싸운 제갈량의 촉나라와는 달리 한 고조는 그 촉나라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 남정 부근에서 잠깐 몇개월 머물렀을 뿐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인적 자원과 물리적 자원을 꼼꼼히 챙기고 끌어들이고 체계적으로 싸운 전투라면, 유방의 경우는 '왕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전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듯한 사람들'이 우당탕탕 한번에 끝내버린 셈. * 제갈량 북벌과의 상황 비교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방은 파촉 지방에서부터 떨치고 나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잠깐 거기 구경 좀 하다가' 다시 '되돌아' 온 것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항우에게 보여주기 위해 "저 지금 파촉왕 하고 있쪄염."하는 식. 물론 안 그랬으면 항우가 보낸 추격자들에게 당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협상을 통해 판순만의 이민족을 얻을 수도 있었고, 한신의 계책을 따라 옛 길을 이용해서 진군한 것도 있었고 여하간에 꽤 쉽게 여러 지역을 돌파했고, '진창'에서 장한을 상대로 한번 대승을 거두면서 그대로 돌파 할 수 있었다. 제갈량의 북벌과 비교해보도록 하자.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진창을 거치지 않고 기곡 방면으로 군사를 보내자 위나라는 지체없이 조진을 파견해 바로 저지에 나섰다. 진창 방면으로 가진 않았지만 촉군이 진창 정도 위치로 북상하기도 전에 위나라 쪽에서 빠르게 저지에 나서는 셈. 물론 관서에 대비를 안했다고 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대비면에서 차이가 있던 셈이다. 이 점이 진창까지는 아무런 감시 없이 별 어렵지 않게 진군했던 유방의 북상과는 다르다. 물론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에선 기곡 방면 진군은 속임수였고 우회군이 주공이었지만. 아예 진창 방면으로 똑같이 진군했다가 학소의 수비에 막혔던 제갈량의 2차 북벌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번엔 진창까지 향하는 촉군을 위군이 중간에서 요격 시도를 하진 않았지만, 이 당시 위나라는 첫 북벌에서 기곡 방면에서 촉나라가 저지되었으니 '다음에는 진창으로 올 것이다'라는 판단 아래 이미 진창성의 수비를 강화하여 준비가 된 상태였고, 그런 준비를 바탕으로 버티는 와중에 왕쌍 등이 이끄는 중앙군이 지원 병력으로 속속 도착하자 제갈량은 퇴각한다. 물론 이 진창 공격 자체도 '무도/음평 공격의 사전 준비 작업 + 오나라에 가해지는 장합의 관중군의 공격'을 진창으로 돌리는 페이크였지만 이미 진창에서 위나라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유방의 북벌 당시에는 이렇다. 앞서 말했듯 남정에 자리 잡은 지 불과 3~4개월 정도 만에 곧바로 움직인 유방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고도를 이용한 루트 때문에 별 대비도 안 되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진창까지의 이동 경로를 내주고, 장한은 진창에서 맞서 싸웠으나 대패. 유방이 남정에 자리 잡은지 3~4개월도 안 되었다는 소리는, 마찬가지로 장한 역시 삼진에 자리를 잡은지 3~4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막 왕으로 부임하여 주변 정리를 하기에도 정신없는 시기이다. 진창의 방비 따위를 학소만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고[* 다만 옹주 변방도시 1정도 수준의 위상이었던 위나라 시기의 진창과는 달리, 당시의 진창은 진나라의 옛 수도로 어찌됐건 옹주 전체에서 알아주는 도시였으므로 기본적인 인프라 자체는 상대적으로 더 잘 깔려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옹주의 어원이 된 옹이 진창이다.] 초군이 진나라를 불태우고 진왕 [[영자영|자영]]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부린지라 그들이 세운 왕인 장한, 사마흔, 동예는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관중의 민심은 이 삼진의 왕을 덜 지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유방이 자신들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할 정도로 기운 상태였다. 이는 이후 유방이 초나라와의 전면전 때 관중 지역의 인원과 물자를 무리할 정도로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중의 민심이 유방을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 이 학소의 수비 당시에도 [[학소]]가 제갈량을 직접 격퇴했다기보다는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그 사이 지원병이 도착하자 제갈량이 물러났다고 한다면, 유방을 상대하는 초나라의 경우는 마침 제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떠나 지원군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초군 입장에서는 기동 거리가 거의 중원 동서 끝에서 끝 정도였던 셈. 만약 '한중'만이라도 초나라의 세력권으로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면 유방의 행보는 크게 제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한중을 제어한다는 것은 남정에서의 모든 군사적 움직임도 한중에서 제어한다 것이다. 유방이 군사적 행보를 시작한다면 한중 자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가버리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불온한 행보는 곧바로 장한에게 보고되었을 테고 장한은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제대로된 준비가 가능했을 것이다. 유비가 한중을 전진기로로 삼고 한중이야말로 익주의 목줄이라고 한 연유도 이와 비슷한 셈이다. 그렇다고 장한이 유방을 저지해낼 수 있는가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시간은 더 끌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동예, 사마흔 등 다른 삼진의 세력과 연계를 꿰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버티면 초군이 제나라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올 수도 있었을 터, 유방은 진나라를 평정하며 질척거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한중은, [[장량(전한)|장량]]에게 뇌물을 받은 항백의 설득 덕에 아주 시원하게 유방에게 '그냥' 덤으로 넘어갔다. 다만 제나라 전역과 관중과의 거리가 멀어서 장한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항우가 관중 지역에 남는다면 자연히 초나라 측은 항우의 보호 없이 제나라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며, 항우가 의도했을리야 없으나 항우가 떠난 직후에 대기근이 관중을 휩쓸었기 때문에 관중 지역의 전략적 가치는 인적 자원 공급 측면을 제외하면 한동안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항우의 입장에서는 [[신안대학살]]까지 벌였던 마당에 관중 땅에 남는다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었고, 당장은 오히려 이 결정에 행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도 있었던 것. * 삼국시대 [[촉한]]과 [[초한쟁패기]] 한고조의 세력 비교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과 위의 싸움은 각국의 '국력 싸움' 양상이었다면, 이 당시 유방의 북벌은 '제후들의 세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나라가 초나라를 무찌르며 북벌한 게 아니라, '제후 한왕 유방'이 '제후 삼진왕 장한 및 사마흔 동예'와 싸웠던 것이다. 비록 남정에 봉해지는 와중에 유방의 군사 일부를 해산시키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유방은 당초 중원의 제후들 중 항우에 이은 2번째로 가장 큰 세력이었다.''' 오히려 힘으로는 어지간한 제후들은 전부 찍어누를 위치였던 것. 유방의 군단을 해산시켜 3만 명만 남겼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 3만 외에도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정도로 그는 이미 영향력 있는 제후였다. 거기다 운좋게도 파 지방의 이민족 판순만의 지원군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제대로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진창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막 옹왕이 되어 자기 세력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한 장한과 일대일 싸움에서 크게 밀릴 이유도 없다. 진창에서 유방을 막아 세웠던 옹왕 장한은 본시 진나라군을 자기 세력으로 가지고 있던 장수였다. 그런데 그 병력은 거록 대전에서 왕리가 대패하며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장수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신안대학살]]로 소멸했다. 장한은 자신이 본시 가지고 있던 세력은 모조리 날려버렸고, 왕으로 봉했다 한들 장한에게 주어진 3~4개월 남짓한 시간으로는 유방을 능가하는 세력을 재구성할순 없었다. 원래부터 인심을 얻지도 못하고 시간도 없어 진나라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진 장한으로서는 자신의 세력을 크게 키우기는 커녕 왕으로 막 즉위하여 주변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3~4개월은 버거웠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또 '삼진'이라고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유방과 적극적으로 싸운 사람은 오직 장한뿐이었다. [[사마흔]]과 [[동예]]는 장한이 계속 패퇴하는 동안 제대로 협조를 하지도 못했고, 장한이 모조리 패퇴당한 다음에야 유방의 침공을 받고 바로 항복했다. 이들 역시 근본은 장한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통일 중국에 대한 소속감이 없고, 초나라인으로서 초나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인 항우가 인식하는 국경 라인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고, 이에 따라서 유방의 북벌 또한 위나라와 제갈량의 그것과 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유방에게 제갈량의 북벌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건 관중 돌파가 아니라 형양 너머의 땅으로 진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형양 · 성고 전역|이 국경선 공방전]]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처절한 과정을 치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